이니스프리는 2009년 ‘제주’를 헤리티지로 삼으며 평범한 5위권 브랜드에서 7년 만에 K-뷰티 1위로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2023년 그 ‘제주’를 떼는 리브랜딩을 단행했고, 2년이 지난 지금 매출은 추가로 18% 줄었습니다.

브랜드의 상승과 흔들림이 같은 자산(헤리티지)을 두고 차례로 일어난, 흔치 않은 사후 검증 사례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ONB랩이 브랜딩 에이전시 시각으로 이니스프리가 ‘제주’를 어떻게 자산으로 만들었는지, 왜 그게 통했는지, 그리고 뗀 후에 무엇이 흔들렸는지를 차근차근 풀어봅니다.
1위까지의 7년, 그리고 그 후 10년

2000년 아모레퍼시픽이 자연주의 1호 브랜드로 출범시킨 이니스프리는, 첫 8년간 업계 5~6위에 머물렀습니다. 더페이스샵이 먼저 ‘자연주의’를 선점했고, 미샤가 저가 로드샵 시장을 열었습니다. 후발 주자였던 이니스프리에게는 자기 자리를 정의할 분명한 정체성이 없었습니다. 브랜드명조차 W.B.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의 호도(The Lake Isle of Innisfree)’에서 따온 것으로, 한국 시장에서는 발음도 의미도 낯설었습니다.
전환점은 2008~2009년이었습니다. 이니스프리는 헤리티지를 ‘제주’로 삼는 전략적 선택을 단행했습니다. 2010년 이후 화산송이·그린티 등 제주 원료를 핵심으로 한 제품 라인업이 출시됐고, 2013년에는 ‘제주하우스’를 열어 매장·카페·체험을 결합했습니다. 결과는 폭발적이었습니다. 2016년 이니스프리는 더페이스샵을 제치고 K-뷰티 로드샵 1위에 올랐고, 매출 7,679억 원으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8년간 매출은 꾸준히 줄었습니다. 2017년 사드 사태로 시작된 중국 시장 위축, Z세대 공략 실패, 인디 뷰티의 부상이 겹친 결과였습니다.

이 위기에 대한 답으로 이니스프리는 2023년 2월, 13년간 쌓아온 ‘제주’ 헤리티지를 사실상 떼는 리브랜딩을 단행했습니다. 새 슬로건은 ‘Effective, Nature-Powered Skincare Discovered from the island’, 새 콘셉트는 ‘고효능 자연주의’, 새 세계관은 가상의 섬 ‘더 뉴 아일(THE NEW ISLE)’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 매출은 18% 추가로 빠졌습니다.
* 헤리티지(heritage): 브랜드가 오랜 시간 누적해온 정체성과 신뢰의 총합. 광고로 한 번에 만들 수 없는 자산.
‘제주’를 어떻게 브랜드 내러티브로 활용했을까?
이니스프리가 ‘제주’를 자산으로 만든 방식을 다섯 가지 각도로 들여다봅니다.

헤리티지의 구체화
같은 시기 더페이스샵·미샤·토니모리·에뛰드 모두 ‘자연주의’를 표방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연주의는 추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자연인지, 어디의 자연인지가 명확하지 않았던 거죠. 이니스프리의 차별화 포인트는 ‘자연’을 ‘제주’라는 구체적 지명으로 좁힌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추상적인 컨셉은 마케팅 카피로 머물지만, 구체적인 지명은 검증 가능성을 만듭니다. 소비자가 제품 뒷면 원산지 표기에서 ‘제주’를 발견하는 순간, 브랜드 메시지가 단순한 광고에서 사실로 전환됩니다. 실제로 이니스프리는 원료의 80%를 제주에서 조달했고, 이 운영 구조 자체가 브랜드의 신뢰를 떠받쳤습니다.

채널·접점의 일관된 서사
이니스프리의 두 번째 자산은 채널 통합이었습니다. 제품(화산송이·그린티), 매장(제주 모양 테이블, 자생식물 배치), 체험(제주하우스, 플레이그린 캠페인), 디지털(이커머스 사이트의 원료 산지 페이지)까지 모든 접점이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랜딩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한 번 좋은 광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접점이 같은 이야기를 일관되게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니스프리는 13년에 걸쳐 그 일관성을 누적했습니다. 매장에 들어선 소비자가 보는 모든 시각·청각·후각 신호가 ‘제주’로 수렴했고, 이 누적이 단일 광고가 줄 수 없는 신뢰를 만들었습니다.
이름의 모순을 자산으로
이니스프리의 세 번째 자산은 의외의 지점에 있습니다. 브랜드명 ‘이니스프리’는 아일랜드 시인 W.B. 예이츠의 시에서 따온 이름이고, 헤리티지는 한국 제주입니다. 보통은 약점으로 보일 이 모순이, 사실은 기회였습니다.
해외 시장에서 이니스프리는 ‘한국 브랜드’가 아니라 ‘청정한 섬에서 온 자연주의 브랜드’로 인식됐습니다. ‘제주’를 모르는 해외 소비자도 ‘Innisfree’라는 이름이 떠올리게 하는 이상향의 섬 이미지로 브랜드 세계관을 받아들였습니다. 한국 시장에서는 제주의 구체성이 신뢰를 만들고, 해외 시장에서는 이니스프리의 보편성이 진입 장벽을 낮춘 거죠. 같은 브랜드가 두 개의 다른 의미 체계로 동시에 작동했습니다.

리브랜딩을 검토하는 브랜드를 위한 세 가지 교훈
이니스프리 사례에서 끌어낼 수 있는 시사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후발주자는 선발주자의 자연주의를 모방할 게 아니라 자기만의 구체적 헤리티지를 정의해야 합니다. ‘자연주의’, ‘클린뷰티’, ‘비건’ 같은 추상어는 이미 포화 상태입니다. ‘○○ 지역’, ‘○○ 원료’, ‘○○ 공정’처럼 검증할 수 있는 구체적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추상어로는 이니스프리가 더페이스샵을 제친 그 7년을 다시 만들기 어렵습니다.
둘째, 헤리티지는 만든 직후가 아니라 오랜 기간 같은 방향으로 쌓여야 진짜 자산이 됩니다. 이니스프리도 ‘제주’를 헤리티지로 잡은 2009년부터 1위에 오른 2016년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사례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전 성심당은 수십 년에 걸쳐 지역 빵집의 정체성을 쌓아 올렸고, 무인양품은 1980년부터 ‘미니멀 라이프스타일’이라는 한 가지 메시지를 반복해왔습니다. 파타고니아의 환경 가치도 비슷한 시간 위에 서 있습니다. 같은 메시지를 같은 방식으로 오래 반복할 수 있는가, 이게 자산화의 실질적 조건입니다.
셋째, 헤리티지가 오래되어 보이는 건 헤리티지 자체의 문제이기 전에 리브랜딩 전략의 문제일 가능성이 큽니다. 리브랜딩을 결정하기 전에 ‘같은 헤리티지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길은 없는가’를 충분히 검토해야 합니다. 이니스프리의 사례는 자산 폐기가 자산 갱신보다 빠르고 쉬워 보이지만, 결과는 그 반대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혹시 지금 리브랜딩을 고민중이신가요?
이니스프리의 부진을 ‘제주가 오래되었다’고 진단했다면, 그 진단부터가 어긋난 것일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제주’를 새 세대에게 어떤 언어로 다시 풀어낼 것인가였을지도 모릅니다.
헤리티지 자체와 헤리티지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른 차원입니다. 헤리티지는 살아 있어도 그것을 새 세대의 감각으로 다시 풀지 못하면, 마치 헤리티지가 낡은 것처럼 보입니다. 리브랜딩을 검토하는 브랜드라면 자기 정체성이 정말 효력을 잃은 건지, 아니면 그 정체성을 풀어내는 방식이 멈춰 있는 건지를 분리해서 봐야 합니다. 둘은 처방이 다릅니다. 전자는 정체성 자체를 다시 정의해야 하고, 후자는 같은 정체성을 새로운 톤·시각·접점으로 다시 풀어내면 됩니다.
이니스프리가 처음 던져야 했던 질문은 “제주를 떼야 하나?”가 아니라 “Z세대에게 제주를 어떻게 다시 말해줄 것인가?”였을지도 모릅니다.
